글라프레스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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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틈이 내 시작점이다. 내 무능력이 내 원천이다.” - 폴 발레리
어떤 사람은 마이클 크레버가 뉴욕에 먹히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애초에 “그러고 싶지 않은” 화가가, 거대하고 멍청한 그림으로 돌아가는 도시의 요구에 부응할 것 같진 않다. 지난 두 전시에서 크레버가 사용한 모든 물감을 더해도 다다 슈츠나 존 커린의 작은 캔버스 하나조차 다 채우지 못 한다.
크레버는 다시 한 번 붓질(paint job)이 중요한 게 아니라 신선한 거리로부터 마련된 아이디어(idea)가 중요함을 보여주었다. 폴 발레리가 시를 “소리와 의미 사이의 지연된 주저함”이라고 불렀듯이, 크레버의 실천은 반복과 방해(혹은 아이디어를 갖는 것과 갖지 않는 것) 사이의 계속되는 주저함이라고 할 수 있다. 한 캔버스, 전시, 스타일에 공을 얼마나 잘, 열심히 들이는지가 중요했던 적은 없다. 그는 잘못된 종류의 작업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기 위한 전략으로 회화를 이용한다. 그를 둘러싼 나쁜 작업들과 그가 만들 수 있는 나쁜 작업들을 포함해서. 크레버는 끊임없이 말한다. 예술가가 그림을 생산할 뿐 아니라 그림도 예술가를 생산한다고. (그리고 관람자, 비평가, 딜러, 컬렉터도.) 우리도 창작에 직접 관여하려면 이 생산 관계가 반드시 방해되어야 한다. [즉, 생산 관계가 해체되지 않으면 우리가 만드는 것은 사실 남이 만든 셈이 된다.]
크레버의 의도가 어찌 되었건, 두 뉴욕 전시와 그 사이의 반 년은 시의적절한 농담을 펼치는 것 같았다. 처음에 그는 한 방울의 물감도 쓰지 않고 레디메이드 담요나 침대보를 반복적으로 이용했고, 그 후 마치 자신의 건조함을 사과라도 하듯이 더 많은 침대보와 함께 돌아왔고, 이번에는 절제된 아크릴을 슬쩍 칠해주었다. … 또한, 그는 작품을 걸지도 않았다. 공간 주위로 작품을 기대어 놓아 포스터에 전시된 “그림 기계”의 생산품을 보러온 당신이 거의 걸려 넘어질 수준이었다. 다른 기계들과 마찬가지로 크레버의 반복은 때로 고장난다. 그림 기계가 늘 앞으로 나아가는 건 아니고, 때로 뒤샹의 Rotoreliefs처럼 자기 자신을 향해 돌아선다. …
가끔 기계는 갑작스럽게 멈춘다. 하지만 멈추지 않는다면 시작할 수 없다.
크레버는 스스로 불가능한 기준을 세운다. 그는 미학적, 역사적 빚의 깊은 구멍, 혹은 벽을 마주보며 시작한다. 다른 화가들을 뱀파이어처럼 차용하는 일로 알려져 있듯이, 크레버는 꼼짝달싹 못하게 갇힌 상태를 주된 작업 원칙으로 삼는다. 그는 자신을 얼리고 멈추는 모든 것의 ‘사용자’다. …
마커스 뤼퍼츠나 이전의 직장 상사 마틴 키펜버거 같은 멘토의 영향으로부터 도망칠 길은 없고, 크레버는 일찍이 자신에게 아이디어가 없음을, 자기가 떠올리는 좋은 생각은 이미 이전에 있었음을 선언했었다. 그래서 그는 두 가지 탈출로를 개발했다.
첫째, 도망치지 말 것.
둘째, 만일 도망친다면 다시 돌아갈 것.
왜냐하면 지그마 폴케에게 머리를 들이받는다고 해서 새롭고 고유한 영역이 개척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당신의 스타일이라는 걸 미리 거부해야 한다. … 크레버의 접근은 아티스트도 결국 레디메이드라는 걸, 그리고 레디메이드는 ‘언메이드(unmade)’ 될 수 있다는 걸 강조한다. [예를 들어, 뒤샹의 변기는 레디메이드였지만 동시에 작가의 예술적 태도 덕분에 공산품으로서 지닌 기능을 탈피했다.]
크레버의 그림 기계가 멈췄다 시작하고 다시 스스로를 이탈시키듯, 그것은 자신의 재료를 순수한 수단으로 전시하고 그 수단을 보통의 목적으로부터 끊임없이 떨어뜨려 놓는다. …
우리는 크레버가 화가보다 전략가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그의 전략은 오늘날, 이전날, 혹은 다음에 올 회화를 구성하는 더 광범위한 시스템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도록 그림을 반복하고 중단하는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 예술이 다시금 가능해지기 위해서 전략이 필요하다. …
그는 자기 정체성의 끝없는 탈중심화를 통해 그를 둘러싼 세계의 손아귀 힘을 느슨하게 만든다. 프롤레타리아 파업이 착취적 생산 구조를 중지시켰듯이, ‘댄디’는 그를 주체로 규정짓는 관계를 중단시킨다. 그는 주체 파업, 혹은 인간 파업을 감행한다. …
별다른 목표 없이 생산 규범을 잠정 중단시키기. …
이것은 중단의 예술이고 반복의 예술이다. 진보적 이데올로기로부터 거리를 확보하는 수단. 부르주아적이든 급진적이든. 크레버의 경우에 중요한 것은 자원과 기능, 수단과 목적의 연결을 해체하고 그림을 자신의 잠재성으로, 하지만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연결짓는 일이다. 잠깐 동안이라도 말이다. 그리고 이 잠깐이 앞으로 반복되어야 한다. …
같은 짓을 하고 또 하는 것만이 변화를 위한 유일한 방법일 때가 있다.